운동 관련 유튜브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구독해서 시청하는 유튜브가 최재천 교수의 것이다. 교수님의 유튜브를 보던 중 교수님께서 추천사도 쓰셨다고 아주 좋은 책이라며 구독자들에게 추천해주시기에 꼭 읽어봐야지, 찜해두고 도서관을 찾았으나 책이 부재했다. 근래 몇 년간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구입하는 일이 손에 꼽는데 오랜만에 책이나 사볼까, 교보문고에 들러 '항해일지'를 구입하고자 했다.
책의 위치를 검색해 서가를 찾아가니 청소년 대상의 책들이 즐비했다. 순간 1차 망설임. 책을 뽑아든 후 너무 얇은 두께와 큰 글씨에 2차 망설임. 그런 것치곤 가격이 비싼데, 3차 망설임. 한참 동안 책을 뒤적거리다 선입견을 버리자, 읽어보면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야. 자위하며 책을 사들고 돌아왔다.
얼룩진 보랏빛의 색감이 예쁜 표지
이 책의 저자 '드니 게즈'는 수학자, 과학사 교수, 역사학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등으로 활동하는 말 그대로 통섭형 인간이다. 그는 수학이나 과학 같이 어렵고 딱딱한 학문을 허구의 이야기로 만들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며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항해일지' 또한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대항해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과 지구과학적 지식을 동화처럼 그려내고 있어 거부감 없이 술술 읽히는 맛이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최초의 쾌속 범선 '라 벨라'이다. 기존에는 사람이 직접 노를 저어 운항하는 갤리선이 주를 이루었지만 쾌속 범선인 캐러벨은 무역풍을 이용해 운항하는 것으로 빠르며 대서양의 거친 폭풍과 파도를 견디는 내구성도 강해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를 여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하게 된다.
소설은 '라 벨라'를 의인화하여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라 벨라'의 첫 항해는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은 책에서는 '라 벨라'의 첫 항해가 1400년대 초라고 쓰여있는데 희망봉 발견은 1488년에 이루어진 일이라 이 갭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전설의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를 발견하기 위한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이었다. ('라 벨라'는 이 항해에서 당시 '죽음의 곶'이라 불리던 보자도르 곶을 최초로 정복한 듯이 말하는데 보자도르 곶 정복은 1434년 질 이아네스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 이 또한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라 벨라'와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폭풍으로 인해 2주간을 표류하다 우연히 아프리카의 최남단인 희망봉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가 남쪽으로 끝없이 이어진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희망봉 발견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곧장 항해가 가능함을 시사하는 의미있는 일이었다. 이후 유럽 탐험대들이 대거 파견되었고 10년 뒤 마침내 인도 항로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라 벨라'는 항해 도중 일어난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납치 등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해 개탄한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 손 쓸 도리가 없었다지만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끼며 참회한다고 하니, 이는 곧 과거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인간의 반성을 통해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1519년 '라 벨라'는 마젤란과 함께 인도를 찾기 위한 서쪽 항로 탐험을 나선다. 당시 아시아의 동쪽을 차지한 포르투갈은 향신료를 독점함으로써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나 북아메리카를 차지한 에스파냐는 그렇지 못했다. 이에 에스파냐 왕실은 마젤란을 고용하여 서쪽 항로를 개척하고 향신료를 얻고자 한 것이다. 반란과 추위, 굶주림 등 갖은 고초를 겪으며 마젤란과 '라 벨라'는 페루해협을 최초로 건넜으며 태평양 횡단에도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항해 끝에 필리핀에 도달하지만 마젤란은 그 곳에서 원주민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후 '라 벨라'는 선원들과 함께 남은 항해를 계속 했고 결국 3년 만에 향신료를 가득 싣고서 에스파냐에 도착할 수 있었다. 5척의 배, 270명이 떠난 탐험에서 1척의 배, 21명만이 살아돌아온 것이다. 이 한 척의 배 이름이 빅토리아호이다. '라 벨라'는 '빅토리아호'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이들의 탐험은 태평양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휭단한 최초의 항해였고 최초의 세계일주였으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유럽의 신항로 개척이 활발해졌고 그들이 아스텍 제국을 하루 아침에 멸망시키며 찬란했던 마야 문명과 잉카 문명은 덧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이러한 배경지식들을 가지고 읽으면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 모른다고 해서 크게 어렵게 느껴지진 않는다. 게다가 지구의 원모양이 레몬처럼 둥그냐, 오렌지처럼 둥그냐 등 지구과학적인 지식 또한 알기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역사와 과학을 '라 벨라'의 이야기를 통해 동화적으로 접해보고 싶다면 추천한다. 그러나 나의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했다는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