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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레이먼드 카버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스토리 pick 2023. 2. 15. 11:34728x90
리얼리즘 문학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을 꾸미지 않고 사실적으로 문학에 반영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을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에는 미니멀리즘이 있는데 이는 과도한 묘사를 배제하고 간결하며 건조한 문체를 지향한다.
하이퍼 리얼리스트인 레이먼드 카버는 소시민의 삶을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해 간결하고 담백하게 그려내는 작가로 '미니멀리스트'라는 수식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으나 정작 그 자신은 '미니멀리스트'라는 말에는 비전과 완성도가 미약하다는 느낌이 있어서 싫다, 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들에는 미니멀리스트로서의 그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인물의 내면세계는 말하기 기법이 아닌 보여주기 기법으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문장은 수식어가 적어 건조하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문장 자체는 단순하게 읽히지만 인물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복잡하기만 하다. 이런 점이 그의 소설을 읽는 묘미가 아닐까. 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하고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몫을 전적으로 독자에게 일임하는 것.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에는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과 절판되어 찾아보기 힘든 작품들까지 총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카버 재단의 승인을 받아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출간하게 되었다는데 그만큼 레이먼드 카버 작품의 매니아층이 탄탄한 듯하다.
이 단편집 또한 다른 단편집들과 비슷하게 가정불화, 알코올 중독, 경제적 궁핍 등 미국 소시민들의 일상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그 중에서도 반전의 재미를 선사하는 '해리의 죽음'을 흥미롭게 읽었고, 특히 어머니, 전부인, 아들, 딸, 동생에게까지 돈을 빌려주며 등골이 휘는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코끼리'는 K 가장의 모습과 겹치며 애잔한 감정이 일었다. 책임감 강한 가장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인생이 고단하긴 만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가까운 누군가가 떠올라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레이먼드 카버는 작품 속에 자신의 삶을 녹여낸 작가이다. 실제로 그는 결혼생활이 평탄치 못했고 지난한 이혼의 과정을 겪었다.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가 있었고 두번이나 파산 신청을 해야만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술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동시에 파괴해갔다. 작품 곳곳에 이러한 작가의 자전적 경험들이 녹아 있기에 우리는 삶이란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불쾌한 농담인 지, 실소하며 깨닫게 된다.
이처럼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은 대체로 개인의 내밀한 일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주제의식이 단조롭다고 느껴질 수 있다. 물론 그 안에서 인간 삶의 본질이라든지, 인간 존재의 근원적 탐구 같은 주제로 확장해나갈 수 있지만 소재 자체가 개인에 매몰되어 있다는 느낌은 쉽게 떨쳐내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편견은 그의 작품 '대성당'을 읽고 단박에 깨어지고 말았다. 단편소설로 퓰리쳐상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의심의 여지 없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작품이었다.
편협한 개인이 진정한 소통을 통해 개안하는 내적체험을 다룬 '대성당'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그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기에 카버의 다른 작품들과 그 결을 달리하고 있으며 작품이 끝나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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